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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탑 개인적인 감상 (결말 해석 후기)

by Der Einzelne 2022.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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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맛이 살아있는 진솔한 대사와 무심한 듯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흑백 화면. 홍상수 감독 영화의 특징이죠. 홍상수 감독의 28번째 장편영화 탑 줄거리와 개인적인 해석 리뷰입니다. 

 

영화 탑 포스터

 

영화 줄거리

한 영화감독이 강남에 위치한 4층짜리 건물에 찾아와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영화는 크게 4개의 덩어리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화가 뚜렷하게 4개의 시퀀스로 나눠지는 건 아니지만 가장 굵직한 장면인 식사 장면을 기준으로 4개의 덩어리를 1~4부라고 부르겠습니다. 

 

영화 탑 스틸컷. 등장인물들의 식사 장면.
1~4부 모두 식사자리에서 하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영화감독 병수(권해효 분)는 지인이자 인테리어 전문가인 해옥(이혜영 분)을 찾아와 자신의 딸 정수(박미소 분)를 소개해줍니다. 정수도 해옥처럼 인테리어를 해보고 싶어 해서 해옥 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소개해준 것이죠. 해옥은 탐탁지 않아하는 눈치지만 병수의 부탁이니 마지못해 들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간단한 대화를 마치고 해옥은 자신이 주인이자 만남의 장소인 4층짜리 건물을 소개해줍니다. 지하 1층은 개인적인 작업실, 1, 2층은 레스토랑, 3, 4층은 세를 준 일반 가정집입니다. 건물 소개를 마치고 병수는 근처에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우고 정수와 해옥은 남아 와인을 마시며 대화합니다. 왜 인테리어가 하고 싶은지, 집에선 아버지이자 남편, 밖에선 저명한 영화감독인 병수에 대한 이야기 등. 와인이 다 떨어지자 정수는 와인을 사러 나가고 1부가 끝이 납니다.
  2. 한 달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병수는 다시 4층짜리 건물을 방문합니다. 해옥에게 어렵게 부탁해 해옥 밑에서 일하게 된 정수가 한 달만에 일을 그만두어 이를 사과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에는 2층에서 식사를 하고 해옥은 레스토랑 주인인 선희(송선미 분)를 소개해줍니다. 선희 또한 해옥처럼 영화감독인 병수를 존경하고 호감을 표하는 인물입니다. 둘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2부가 끝이 납니다.
  3. 또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병수는 건물 3층에 선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선희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며 외출을 하고 병수는 공허하게 선희를 기다립니다. 침대에 누워 선희를 기다리고 있던 중 선희가 돌아옵니다. 화면 바깥에서 들리는 선희의 목소리. 그런데 화면은 병수를 비추고 있지만 화면 바깥에서 선희의 목소리와 함께 병수의 목소리도 들립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광경. 그리고 3부가 끝이 납니다.
  4. 시간이 흐른 뒤인지 알 수 없습니다. 병수는 건물 4층에 혼자 살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부동산 업자인 지영(조윤희 분)이 찾아와 식사를 준비해주고 이런저런 선물도 해줍니다. 둘은 식사를 마치고 함께 외출을 하러 건물 1층으로 내려갑니다. 잠시 사무실에 볼 일이 생겨 다녀온다는 지영. 병수는 혼자 담배를 피우며 지영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멀리서 다가오는 정수. 1부에서 와인을 사러 갔던 정수가 편의점에서 와인을 사들고 오며 병수를 만나 대화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납니다.

 

나(너)는 누구인가?

딸 정수를 해옥에게 맡기고 병수가 자리를 비운 뒤 정수와 해옥이 대화를 나누던 중 병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딸인 정수는 '아버지가 밖에선 유명한 영화감독이어서 존경받는 사람일지는 모르겠으나 집에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는 그렇지 않다. 가정에 소홀했고 바깥으로 돌며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닌 사람이다'라고 폄훼합니다. 얘기를 듣던 해옥은 '아니다. 한 사람의 모습을 어떻게 가정에서의 모습으로만 판단할 수 있느냐. 밖에서 바라보는 병수도 병수다. 오히려 밖에서의 모습이 진짜일 수도 있다'라고 반박합니다. 

 

1부에 나온 이 대화로 이 영화가 어떤 주제의식을 던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보고 있는 모습이 진짜 나일까요 아니면 밖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꾸며진 모습이 나일까요. 아니면 그 둘 모두 나일까요. 영화는 등장인물들과 4층짜리 건물을 통해 나름의 의견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모순적인 면모 

병수는 굉장히 모순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2부에서 처음 선희를 만난 병수는 선희에게 신의 존재를 묻습니다. 선희가 교회에 다니고 신을 믿는다고 하자 병수는 신은 사람이 만들어낸 관념 같은 것이라 말합니다. 사람은 나약하기 때문에 의지할 곳을 찾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존재라 말하죠. 그런데 4부에서 병수는 식사 중간에 기도를 합니다. 그리곤 지영에게 자신이 신의 음성을 들었고, 신을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고 간증합니다. 

3부에서 병수는 건강을 생각해서 채식을 하는 채식주의자로 나옵니다. 그런데 4부에서는 건강을 생각해서 고기를 먹습니다. 3부에선 절제하는 인물로 그려진 병수가 4부에선 고기와 술, 그리고 산삼을 동시에 먹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3부에서는 직접적으로 모순적인 병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친구를 만나러 간 선희를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해하다가 얼른 돌아오라며 재촉하는 문자를 보냅니다. 핸드폰을 갖고 가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실망해 침대에 드러누워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뇝니다. "나는 혼자 사는 게 맞아. 혼자 있는 게 좋아" 그런데 늘 병수의 곁에는 그를 보살피는 여자가 있습니다. 극 중 나온 선희, 지영을 비롯해 딸인 정수가 말했던 '집 바깥으로 나돌면서 이 여자 저 여자 만났다나 봐요' 증언에 등장하는 여자들까지요. 

 

과연 어떤 게 진짜 병수의 모습일까요? 진짜 병수는 어떤 인물일까요? 이런 모순적인 면모, 혹 밖에서 보이는 모습과 가까운 사람들이 보는 모습이 다른 건 병수뿐만이 아닙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자 주제인 4층짜리 건물 건물주인 해옥을 보면, 우선 1, 2부에서 병수를 대하는 태도와 3, 4부에서 병수를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1, 2부에선 저명한 영화감독인 병수에게 호감을 표하고 친근하게 대해줍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가정을 꾸린 3부에서는 좀 더 쌀쌀맞은 태도로 병수를 대합니다. 4부에서는 병수에게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느냐며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1부에서 정수가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갔을 때 1, 2층 레스토랑 종업원인 쥴과 함께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눕니다. 쥴은 해옥이 보기와는 다르게 사람을 가려서 만나고 자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만 좋아한다고 흉을 봅니다. 마치 정수가 해옥에게 가까이서 본 병수는 밖에서 보이는 모습과 다르다고 말하듯이 말이죠.

 

정수도 1부에선 아버지를 흉보며 쌀쌀맞게 대하는 것 같지만 4부에서 와인을 사고 돌아온 정수는 병수의 건강을 걱정하며 살뜰히 챙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병수, 해옥, 정수 등)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런 모순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공간으로 표현된 주제의식

영화의 배경인 4층짜리 건물도 주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겉에서 바라본 4층짜리 건물은 '레스토랑'처럼 보입니다. 가장 눈에 보이는 1층이 레스토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건물을 인식할 때에 가장 먼저 보이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1층을 보고 그 건물을 인식합니다. 하지만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1, 2층은 레스토랑이지만 3, 4층은 일반 가정집입니다. 그리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1층은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개된 레스토랑, 2층은 예약을 해야지만 이용할 수 있는 레스토랑, 3층은 부부가 살고 있는 가정집, 4층은 남자 혼자 살고 있는 집입니다.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낼수록 건물을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고, 자세히 파악한 뒤에는 그 건물이 '어떤 건물이다'라고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1부 시작을 열며 정수와 해옥이 던졌던 질문, '집에서의 나와 밖에서의 나. 어떤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일까?'에 대한 답이 공간으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애매모호함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영화 내에 사용되고 있는 애매모호한 장치입니다. 1부, 2부, 3부까지는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 또한 나름 일관성이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4부에서 갑자기 틀어집니다. 그간 나왔던 병수의 모습과 차이가 있는 병수가 등장합니다. 시간적으로도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어쩌면 똑같은 인물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요. 이러한 불편한 비틀기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합니다. 관객으로서의 우리도 영화를 쭉 보며 파악한 등장인물을 뒤집어엎는 효과를 가져오니까요. 

 

그런 병수가 마지막 장면에선 1부에서 와인을 사러 갔던 딸을 맞이합니다. 여기서 또 한 번 시간과 인물 설정의 모호함이 더해집니다. 선형적으로 흐르던 시간이 원형으로 바뀌어 건물에 갇힌 채 계속해서 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영화에서 가까이 보면 차이가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다 거기서 거기 같아 보이는 건물처럼, 우리네 인생도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뭐라 확실히 규정할 수 없는 그저 그런 인생이 계속해서 빙글빙글 원안에서 돌고 있는 것이죠. 과거의 영광, 일, 사랑, 가족, 건강. 들여다봐야 알 수 있는 인생이라는 건물 안에서요. 

 

해석의 재미

홍상수 감독 영화의 재미는 이렇게 해석하는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해석과 다른 다양한 해석을 보고 대화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작품 같습니다. 영화 외적으론 홍상수 감독의 개인적인 삶과 이 영화에 투영된 병수라는 페르소나와 비교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겠죠. 전작들에 비해 위트 있는 대사나 재미요소는 덜하지만 훨씬 더 정제된 화면 구성, 빼곡한 메타포로 이야깃거리가 많은 작품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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